교회 이야기 (2) - 종교분쟁에 관한 설명?

["목사가 목사에게"라는 글과 또다른 사건으로 결국 오랫동안 밀어놓았던 글을 써버림.]
[교회이야기 (1)을 굳이 먼저 읽을 필요는 없음.]

0. 무엇이 중요한가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고, 개개인이 가지는 믿음의 이유랄지, 형태도 여러 가지다. 사실, 김규항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났든 그렇지 않았든, 부활을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의 인간으로서의 삶, 그가 우리 생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끼친 영향만으로도 그는 대단한 존재였고, 기독교가 이지러져간다는 지금까지도 그러한 존재이다. 반대로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났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 그 후로 살아있는 모든 이와 죽은 모든 이를 심판하는 존재임을, 그리고 그를 통해 영혼의 구원과 육신의 부활을 믿는 것도 과학적 설득력과는 무관하게 존중받아야 하는 세계관이고 종교의 자유로서 보호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다른 세계관 자체가 아니라, 그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이며, 그 행동에 바탕을 둔 비판을 성찰할 수 있는 배포가 있느냐 없느냐인 것이다.

1. 절대성과 상대성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 체계가 닫혀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닫힘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약점을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데 있다. 무슨 말이냐고? 기독교의 교리는 유일신의 절대적인 존재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 절대적인 믿음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기독교만이 참 종교이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 이 자체로는 매우 중립적인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종교와의 교류 내지는 충돌에서 발생한다.

A와 B라는 두 사람이 있고, 그 둘을 각자 다른 두 종교의 신자이다. 그리고 그 두 종교 각자 절대적인 유일신을 숭배한다. 이 두 종교를 믿는 두 사람이 만나서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 대화가 될 턱이 없다. A는 B가 미신을 숭배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를 참 종교의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B도 A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둘의 신앙심이 똑같이 깊다면 둘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둘 중 하나의 신앙심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들을 종교적 평행선을 걷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적인 해결책은 둘이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종교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상황에서 원리주의 교리를 따르는 A가 기어이 B를 이겨먹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A는 B의 종교를 종교라 인정하지 않고, 사이비, 미신, 우상숭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마도 B를 진정한 종교로 인도하고 싶은 마음에서) B의 신성한 곳을 어지럽히고, B의 종교 의례를 무시하고, B가 그의 종교에 따라 행하려는 것을 막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행동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A의 종교가 그 절대성을 주장하는, 닫힌 체계이기 때문이다. A의 종교 입장에서 보자면 B의 믿음은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B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A의 종교가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각 종교가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를 그 체계 안에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절대적인 가치가 충돌하면 무의미한 상대성에 직면하게 된다. 다시 말해 A가 자신의 종교를 유일한 참 종교라고 말하는 근거는 모두 그 종교 체계 안에서 인정되는 것들이고 (예를 들면 교리서나, 성지나, 성물, 성인 등등), 그러한 근거는 B의 종교 체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B의 교리, 성지, 성물, 성인 등은 A에게는 미신일 뿐이다. 각 종교는 연역법이다. 스스로의 체계를 절대 참이라고 가정하고, 그 안 에서만의 통일성을 추구할 뿐, 다른 체계를 만났을 때 새로운 사실을 접수하고, 새로운 가설을 세울 능력이 없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이 그렇게도 서로를 껄끄러워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렇게 각자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라도 상대방에게는 무용지물이라서 답답해 미치겠는 경우, 인간은 보통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한다. 하나는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종교의 배타성이라는 것은 절대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에 불과하다. 그 다른 종교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A를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A는 말이 아닌 물리력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A가 사회적으로 강자인 경우를 우리는 종교탄압이라고 부르고, A와 B가 서로 대등한 경우 우리는 종교 전쟁이라고 부른다. 인간들이 수백, 수천 년 동안 치루어 온 크고 작은 종교 전쟁들이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종교의 절대성/배타성에서 기인하는 사회문제의 여러 변형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절대적 종교가 강하지 않거나,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이 충돌하는 일이 적은 비서구권에서 종교관련 탄압/전쟁이 기독교의 전파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종교와 국가/사회의 분리

종교가 비교적 작은 집단에서 출발한 경우, 종교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종교 생활"의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사회생활 전반을 관장하고 그 집단의 특유한 가치관을 반영하고, 그 집단의 결속을 도모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러한 광범위한 종교의 기능이 가정으로, 국가로, 학교로, 직장으로 점차 분리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교리라든가 체계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냉장고가 없던 시절 더운 지방에서 날고기는 위험한 음식이었다. 특히 지방이 많은 돼지고기나 이동경로가 긴 바다고기의 경우는 먹고 탈이 나거나 심하면 죽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적인 해결책이다. 돼지고기는 불길한 것이니 먹지 말라든지, 생선은 반드시 익혀 먹어야 한다든지 따위다. 꼭 체계가 잘 갖추어진 종교일 필요도 없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바로는 중국 사람들이 머리를 잘 감지 않는 것은 황하 지방에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강물이라도 깨끗하지 않다보니 씻는 게 안 씻는 것보다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멱을 감으면 귀신이 들어온다고 으름장을 놓고, 그렇게 사회 구성원 전체의 건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 동네 음식이 유난히 모두 튀김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로 헹구어서 깨끗하지가 않으니 기름에 튀겨야지.

기독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 십일조도 성서에 기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교회라는 체계가 국가의 역할을 했던 중세적 이야기이고, 예수가 유태인이 아닌 이들을 경멸하고 차별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유태인의 우월성을 근간에 두고 있는 유태교에서 출발했다는 점 자체도 그렇고, 동성애를 금기하는 것도 사실은 출산을 장려하고 인구를 늘리려는 계획의 일환이고 (성서에나오는, 네 자식들이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해주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일게다.) ...

문제는 이러한 오래된 교리 중 근대 사회에 맞지 않는 것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쳐지기는 커녕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다. 다른 종교와 맞닥뜨릴 경우 사람은 보통 위에 적은 것처럼 돌아서서 가버리거나 물리력을 행사하는데, 같은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돌아서서 가버릴 데는 없고, 물리력을 행사할 수도 없으니, 신도들은 혼란을 느낄 밖에. 다양한 사람이 뒤엉켜서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유태인들이 우월하다느니, 동성애자들은 지옥에 간다느니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물론 자기네끼리만 모여서 그런 생각을 나누는 것은 당장 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나가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누구 동상 목을 벤다든지, 남이 신성하게 여기는 사원에 가서 자기네 찬송가를 부른다든지 하는 건 말이다,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예의에 대한 문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그러한 교리 외에 새로운 사회, 바뀐 세상에 맞는 교리가 없다는 점, 그리고 그 틈새를 몇몇 목회자들이 파먹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근간을 만들었다고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공유한다고 볼 수도 있는 기독교가 그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라도 교회 잘 나오고 헌금 많이 내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군화발로 민주주의를 짓밟아도 자신들의 재산과 영향력을 인정해준다면 신이 내려준 지도자고 하는 식이다.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돌리고, 그에 대한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이단이니, 믿음이 약하니 등등 딱지를 붙여놓으면 이야기가 통할 턱이 없다. 그러한 교회가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 스스로의 배를 불리기 바쁜 경우가 허다한데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할라치면 종교탄압이라고 아우성을 치니, 예수가 보면 한탄을 할 노릇이다.

3. 개인의 기독교 신앙과 교회라는 집단

모태신앙이 아니라면 (아직도 과자 부스러기로 아이들을 현혹하는 수준의 선교가 이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신앙인이 자신의 아픔을 치유받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위기를 극복할 힘과 지혜를 얻기 위해 교회를 처음 찾은 경우가 대부분일게다. 인간이란 본디 육체가 죽게 되어있는 것이고, 그 살아있는 날도 스트레스 안 받고 마음껏 신이 내려준 선물을 만끽하며 살기보다는 고통과 고민과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기 마련이니, 특히 아프기라도 할라치면 교회는 진정 인간의 삶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힘든 상황에서 종교에 귀의해서 영혼의 평안을 찾는 것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한 이후의 삶이다. 그 종교가 나에게 평안함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목회자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종교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신앙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게 바로 이런 개인적인 끈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교회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가장 못된 교회, 가장 교회답지 못한 교회를 비판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발끈할 게 아니다. 스스로 수백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이교도"들을 죽이고, 마녀사냥을 했고, 예술과 과학을 탄압했고, 소수자들을 억눌렀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 당장도 자신이 또다시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앞에 열거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기독교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사고체계를 갖춘 인간인지조차도 의심스럽다.) 개인적인 고통과 번뇌로 이성의 끈을 살며시 풀고 마음을 다독여줄 안식처, 절대자의 힘을 빌었다고 해서 다시는 그 상식의 끈을 조여매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점에 대해 "인간의 예의보다 종교가 중요해. 우상숭배를 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고, 나는 신의 종으로서 그를 응징해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신이 보시기에 만족스러우셨을지, 그런 신을 믿는 것이 유일한 진리인지 아리송해진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고작 수천년에 걸쳐서 인류의 아주 일부만 믿고 섬기는 절대자라는 게 말이 되는가?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우리에게 준 진정한 숙제는, 서로의 피를 보면서 하나의 종교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교회라는 틀을 넘어서 어떻게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지가 아닐까? 아마도 바벨탑을 무너뜨리면서 다른 언어를 주었다는 성서 이야기도, 꼭 다른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넘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풀어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4. 다원성, 그리고 인본주의라는 말

물론 이렇게 길게 쓴 글은 모두 근대 민주주의적 사고를 바탕에 두고 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고,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천부인권"의 일부인 종교의 자유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절대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닫힌 체계의 기독교인들에게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천부인권이라는 말을 앞세워 한 종교의 폭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종교가 똑같은 이름을 부르짓는 다른 종교인들을 무시하고 탄압하는 것,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의 기독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근대성이다. "내가 믿는 신이 절대 참이라고 할지라도 그 진실과 나의 생각은 별개이다. 내가 신의 뜻이라고 그토록 신실하게 믿는 것이 사실은 신의 뜻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의지하는 우리 교회의 목사가 사실은 신의 뜻을 왜곡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지독하게 기초적인 이성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리고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그 마비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다면, 교회야말로 우리 영혼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이 분명하고, 우리는 그 병을 안고 죽게 될 지도 모른다.

블루룸,
종교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데...


by blueroom | 2007/10/07 14:19 | Trapeze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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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이야기(2)를 쓰기 전에 예전에 쓴 글을 먼저 옮긴다.](2005)내가 교회에 가서 "하느님/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받는다거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여기 오는 사람 중에도 ... more

Commented by 따뜻한번영 at 2007/10/08 20:28
정확한 시각을 가지신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가장 염려하던 부시와 기독교에 대해서도 논지가 잘 전달되어 모처럼만에 글다운 글 잘 읽어습니다 뭐하시는 분이신지는 몰라도 이쪽에 직업 가지셔도 될 정도로 실력이 상당하시군요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Commented by blueroom at 2007/10/09 03:49
하핫, 칭찬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ellin at 2007/10/26 21:48
정말 멋져요.. 저도 신의 존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종교전쟁은 곧 인간의 욕망과 열정, 편견, 집단간의 갈등으로 만들어진것이라 생각해요..
만들어진 신이란 책 읽어 보셨나요? 그 책의 저자를 꼭 만나보고싶었는데, 님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해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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