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과 노예제, 왜 페미니즘이 미안해야 하나?

[페미니즘은 나쁜가요?에서 트랙백]

페미니즘에 대해 이런 저런 글들이 많이 뜨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한 줄...

이런 저런 논쟁을 보면서 떠오르는 질문: 사람들은 왜 페미니즘에 대해 무조건 적대적 마음이 생겨나는 것일까? 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온건한 사람이라고 포장해야 하는 걸까? 왜 페미니즘이 삼키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계륵같은 것이 되었을까? 왜 여성의 인권을 이야기하면 군대 얘기가 따라나오고, 꼴페미로 찍히는 것일까? 노동자를, 학생운동을 무지막지 짓밟던 군부시대도 아니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절제하여 표현해야하는 일은 웬 조화일까? 도무지 알 수 없다... 나의 상상력이 빈약해서인지는 몰라도 마치 노예제 폐지에 무조건 반대하던 미국 초기 노예지주들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판결문을 쓰는 판사들을 보는 것 같다.

노예제와 가부장제의 공통점은 (그리고 이것은 많은 비윤리적인 제도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바로 사회가 설정한 "자연의 질서"를 개인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노예제가 영국에서 먼저 금지되고나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미국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노예제가 남북전쟁을 통해 없어진 다음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 잔재가 남아있(었)다. 집에 가서 책을 찾아 다시 올리겠지만, 노예제가 얼마나 "자연의 순리에 부합하는" 제도인지 역설한 판결문이나 연설문들을 보면, 참, 한숨밖에 안 나온다.

가부장제를 역설하는 우리네 동시대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인간의 삶을 존중하기로 약속한다면, 개인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폐를 끼치지 않는 개인의 임신, 육아, 직업, 가정생활 등등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도대체 근본을 알 수 없는 "여자는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르고, 아들을 따라야한다."라든지, "북어와 여자는 두들겨야 제맛"이라든지 그 수준이 낮다 못해 야만적인 이따위 말들부터 시작해서 "여자라면 당연히"로 시작하는 수많은 말과 행동들은 그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한 현상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바꾸기 위한 운동이 이글루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이글루의 페미글루스와는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 아닌가!

개중에는 페미니즘의 급진성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개진하며, 자신은 마초도, 페미니스트도 아니라고, 단지 사회의 윤리가 변화해 나가기 위해 시간이 걸리니, 그에 맞추어 변화의 수위를 조절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글들도 있더라. 그것도 웃기다. 첫째로, 그들의 "논리적" 입장에 대해서는 다시 글을 쓰겠지만, 그 논리에 비비며 자기 자신이 그 가부장제에 빌붙어 먹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이 아니꼽다.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아내, 누나, 여동생, 여자친구들이 지금 당장 당하고 있는 불합리한 일들을 "사회가 변하기를" 기다리며 시정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

미국의 유명한 흑인 인권 운동가인 (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그의 운동을 "원칙적으로는 지지하"면서도 그 지지를 표현하기를, 행동으로 옮기기를 꺼리는, 그러면서 그의 운동이 시기상 부적절하고 현명하지 못했다("unwise and untimely")고 평가하는 남부의 백인 목사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We know through painful experience that freedom is never voluntarily given by the oppressor; it must be demanded by the oppressed. Frankly, I have yet to engage in a direct-action campaign that was "well timed" in the view of those who have not suffered unduly from the disease of segregation. For years now I have heard the word "Wait!" It rings in the ear of every Negro with piercing familiarity. This "Wait" has almost always meant 'Never." We must come to see, with one of our distinguished jurists, that "justice too long delayed is justice denied."

"우리는 가슴아픈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탄압받는 이들이 스스로 얻어내지 않는 한, 탄압하는 이들은 절대로 자유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 한번도 인종차별의 설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말하는 "시기적절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벌써 수년간 저는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기다리라는 말은 모든 흑인들에게 너무나 뼈저리도록 익숙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다리라"는 말은 "영원히"라는 말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의실현이 미루어지면,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한 법조인의 명언을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Martin Luther King, Jr., April, 16, 1963 Letter from Birmingham Jail

물론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킹 목사가 이 글을 쓰기 10년 전인 1953년에 이미 흑인과 백인을 공립학교에서 차별할 수 없다는 Brown v. Board of Education 판결이 나왔지만, 그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조차 남부 공립 초등, 중등 학교의 흑백인 차별은 공공연하게 계속되고 있었고, 그가 이 글을 쓴 5년 뒤인 1967에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버지니아 주법이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건의 불씨가 된 흑인 남자를 체포했던 경찰은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최근까지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이 천천히 바뀐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열심히 "과격하게" 바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렇게 천천히 바뀌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과격한 사람들이 있어도 이렇게 느리게 바뀌는 세상, 우리가 지금 과격하지 않으면, 도대체 바뀌기나 할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블루룸,
또 다시 늦었지만,
아직도 대열에 합류하고 파...
by blueroom | 2007/06/20 23:28 | Trapeze | 트랙백(1) | 핑백(2)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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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민노씨.네 at 2008/02/18 01:19

제목 : 비판
쉬운 일은 비판이라기 보다는 신경질, 투정, 비난이다.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된' 비판은 비록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기존 의미관계, 권력관계에 창조적인 균열을 가져오기 때문에 생산적이다.0. 비판만 있고 대안이 없잖나?? 라고 볼멘 소리하는 일이 오히려 굉장히 쉽다. 그건 기존의 권력관계와 의미관계에 조력하는 일이 되기 쉽고, 좀더 부정적인 측면을 (우려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기득권과 기존 권위에......more

Linked at Blue Room : 남자의 .. at 2007/10/18 05:50

... [....남자의 기득권이란 대체 뭘까? & 내가 했던 남녀차별.에서 더블 트랙백]바로 앞 글을 써서 올리다보니 메인에 남성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 기득권에 뒤따르는 의무가 싫다, 스스로 버리고 싶다, 남자고 여자고 그런 게 따라 붙으면 안 되 ... more

Linked at minoci님의 글 - [20.. at 2008/02/12 17:51

... 공감하는 친구들은 ← 2008년 2월 1 2 3 4 5 6 7 10 11 12 12 Feb 2008 0 metoo 그렇게 과격한 사람들이 있어도 이렇게 느리게 바뀌는 세상, 우리가 지금 과격하지 않으면, 도대체 바뀌기나 할지 생각해보자- 블루룸, 가부장제와 노예제 중에서 : 글 초반이 특히 흥미롭다. 오후 5시 51분 블루룸 페미니즘 노예제 댓글 (0 ... more

Commented by 민노씨 at 2008/02/12 17:52
틈틈이 블루룸님께서 '스스로 추천한 글'을 읽어야겠네요.
글 초반에 주신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들은 특히나 인상적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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