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하는 (또는 해내는) 것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에서 트랙백]

이글루스 대문짝에 추천된 글을 읽고는 문득 생각나서 예전에 쓴 글을 올린다.
저재작년에 쓴 글인 것 같다.

---------------------------------------------------------------------------------------

아는 것과 하는 (또는 해내는) 것

(2006 or 2005)


지행합일같이 쉬운 말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 말을 주워들은 국민학교 시절 언젠가부터 책에 나오는 자질구레한 규칙들을 그대로 하려고 노력했었다. 쪽팔려도 건널목에서 손을 들고 건너고, 나쁜 말도 안 쓰고, 사람들을 웃는 낯으로 대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어리다보니 잘 안되고 아차 싶은 때도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몇 년 노력하면 나도 도를 트겠구나 싶고, 왜 이런 당연하고도 간단한 원칙을 한자까지 쓰면서 멋진, 무슨 성인 아니면 못지킬 대단한 좌우명으로 삼나들 하는 생각은 그후로 상당히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후로 스무해가 가면서 세상이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그런 규칙따위 지키지 않는다는 것쯤은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고, 그럼에도 나는 지키면서 살아보리라는 마음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희미하게 지워져 갔다. 대학 다니면서,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그리고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그런 모습들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다시 찾아왔었더랬다. 한편으로 시덥지 않은 비겁한 "세상이 그런거지"식의 변명쯤은 갈갈이 찢어버릴 말빨을 키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는 것, 세상에는 그런 거 말고도 지켜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얼마나 무시무시한 희생으로 끝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둘 사이에서 나의 바램은 그것들을 지켜나가는 삶이 아니라 그저 그런 것들에 대해서 고민했던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 초라하게, 아주 비겁하게 쪼그라들어버렸다.

그러나 아는 것 없는 나도 그런 부채의식을 지고 산 덕분인지, 역시 멋진 여자친구를 만나 배우고 따라하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다시 미친 척 모르는 척 이것저것 해볼 마음이 생긴다. 뭐, 지금까지 별로 그럴 자리에 있어보지도 않아서 그런 것인지, 이미 나를 보수적인 틀에 맞추어놓고 시작해서인지 갸우뚱하지만, 웬지 모를 긴장감이랄까, 희망이랄까 그런 것도 생기고... 그러던 중에 건너건너 아는 분이 쓴 글과 그에 달린 답글들을 보고 또 한숨을 쉬었다. 상당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조그맣게나마 펼칠 수 있는 위치에서 결국은 세상의 기준에 따라가버리다니... 그 분에 대한 실망보다는, 세상이 얼마나 매몰찬지 나 자신에 대한 점검부터 해야지 싶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것, 많이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널리 적용시켜서 자신의 위치를 잡는 것, 그 모든 것보다 마지막 한 발짝인 자신이 해내는 것이 훨씬 힘들고 그만큼 의미있다. 졸업하기가 무섭게 성형수술을 하려고 계를 묻고 적금을 붓는 여고 졸업생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기 전에 왜 그들이 그러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자. 예쁘게 생기지 않으면 어느 조그만 사무실에 직원으로 취직하기도 힘든 여고생들을 욕하기 전에 누가 방송을 통해서 신문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자신감을 빼앗아버렸는지 물어보자. 방송을, 신문을, 사회를 꿰뚫고 있는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떠들기 전에 나 스스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를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허벅지 살을 꼬집으며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을 다하자. 비록 그것이 지금 당장 내게 손해로 보일지라도, 지금 그것이 당장 나를 바보로 만들지라도.

아무도 손해보지 않으려하면, 우리가 아는 것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영원히 그렇게 추상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와 개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닮은 꼴이다.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은 혁명도 할 수 있다.

블루룸,
아, 답답해...

by blueroom | 2007/06/09 22:55 | Trapeze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blueroom.egloos.com/tb/29300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